역사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의 전신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며 복음주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준 세계적인 설교자이자 성경교사, 신학자, 선교운동가였던 아더 T. 피어선(Arthur T. Pierson) 박사가 강조한 성경과 선교와 연합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10년 12월초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의 놀라운 결실과 기독교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을 목격하고 큰 감동을 받은 피어선 박사는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경학원 설립을 약속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11년 6월 병환으로 뉴욕 브루클린 자택에서 소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더 피어선의 장남인 델러반 L. 피어선(Delavan L. Pierson)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피어선 박사의 친구들로 구성된 피어선기념위원회를 미국과 영국에 조직하였고 신학교 시절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선교 동반자였던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박사를 조선 현지 유지재단의 초대 이사장이자 원장으로 임명하여, 1911년 9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장감연합의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School, 원장: 언더우드)을 합병한 후 1912년 9월 18일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개교하였다.
이후 피어선기념위원회(이사장: 로버트 스피어, 총무: 델러반 피어선)의 후원으로 1914년 경 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89번지에 교지를 마련하고 1917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본관건물을, 1918년 남자기숙사를 각각 완공하게 되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설립초기부터 초교파적 복음주의 연합교육기관으로서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부가 협력하며 공동운영하였으나,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원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원할 수 없었던 양 감리교 선교부가 1935년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 선교부가 주도하여 경영을 맡기도 하였으나 창립이념인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고수하였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평신도 성경교사 양성과 신학교 진학 예비 후보생 교육에 중점을 두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각 교파 신학교로 진학하기 전에 예과 성격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성경교육과정을 제공하였으며 이에 초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을 복음화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일제에 항거해 피어선기념성경학원 학생인 유재헌 등의 주도로 항일독립운동을 계획하여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기숙사에서 제2의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격문 수 만매를 인쇄하여 대규모적인 거국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로 자진 폐교하였고(1941~1945) 8.15 해방과 더불어 다시 개교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학원운영이 중단되었다가 1953년 5월에 다시 개교하게 되었다. 1968년 교명을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칭하였고 그 후 조기흥 현 평택대학교 총장이 4년제 대학으로 재설립 하였으며 1996년 현재의 평택대학교로 교명이 개명되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신학 교육기관 중의 하나로서, 김인영(정동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 송창근(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교장), 한상동(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및 고신대학교 창립자), 윤치호(공생원 설립자), 유재헌(제2 6․10만세운동 주도자) 등과 같은 한국교회의 선도적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후신인 평택대학교 신학과는 성경과 선교와 연합 정신 아래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10년 12월초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의 놀라운 결실과 기독교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을 목격하고 큰 감동을 받은 피어선 박사는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경학원 설립을 약속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11년 6월 병환으로 뉴욕 브루클린 자택에서 소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더 피어선의 장남인 델러반 L. 피어선(Delavan L. Pierson)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피어선 박사의 친구들로 구성된 피어선기념위원회를 미국과 영국에 조직하였고 신학교 시절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선교 동반자였던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박사를 조선 현지 유지재단의 초대 이사장이자 원장으로 임명하여, 1911년 9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장감연합의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School, 원장: 언더우드)을 합병한 후 1912년 9월 18일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개교하였다.
이후 피어선기념위원회(이사장: 로버트 스피어, 총무: 델러반 피어선)의 후원으로 1914년 경 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89번지에 교지를 마련하고 1917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본관건물을, 1918년 남자기숙사를 각각 완공하게 되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설립초기부터 초교파적 복음주의 연합교육기관으로서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부가 협력하며 공동운영하였으나,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원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원할 수 없었던 양 감리교 선교부가 1935년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 선교부가 주도하여 경영을 맡기도 하였으나 창립이념인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고수하였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평신도 성경교사 양성과 신학교 진학 예비 후보생 교육에 중점을 두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각 교파 신학교로 진학하기 전에 예과 성격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성경교육과정을 제공하였으며 이에 초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을 복음화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일제에 항거해 피어선기념성경학원 학생인 유재헌 등의 주도로 항일독립운동을 계획하여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기숙사에서 제2의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격문 수 만매를 인쇄하여 대규모적인 거국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로 자진 폐교하였고(1941~1945) 8.15 해방과 더불어 다시 개교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학원운영이 중단되었다가 1953년 5월에 다시 개교하게 되었다. 1968년 교명을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칭하였고 그 후 조기흥 현 평택대학교 총장이 4년제 대학으로 재설립 하였으며 1996년 현재의 평택대학교로 교명이 개명되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신학 교육기관 중의 하나로서, 김인영(정동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 송창근(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교장), 한상동(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및 고신대학교 창립자), 윤치호(공생원 설립자), 유재헌(제2 6․10만세운동 주도자) 등과 같은 한국교회의 선도적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후신인 평택대학교 신학과는 성경과 선교와 연합 정신 아래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성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의 신학적 입장은 초교파적 성서적 복음주의이다.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교수진은 이러한 신학적,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해석과 주석에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올바르게 전하도록 인성과 영성과 지성을 갖춘 설교자, 목회자를 배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졸업 후 진로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은 초교파 신학대학원이지만 목회학석사(M.Div.) 졸업생은 본교의 협력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피어선총회, 한영총회, 백석대신총회, 기독총회, 전국초교파신학대학원연합회, 독립교회선교연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목회사역을 할 수 있으며 교회와 선교단체 및 기독교 전문사역단체 에서 사역할 수 있다.